고대의 경제, 중세 사회의 경제

고대 사회의 형성에 있어서 대부분의 경제 생활의 중심은 농업이었습니다. 따라서 과거에는 토지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높았습니다. 삼국 시대에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적인 귀족 정치가 성립됨에 따라서 모든 국토는 왕토라는 사상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백성 개인에게 속한 토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며 평민인 자영 농민들은 자기의 토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전쟁이 빈번했던 시절에 공이 있는 장군이나 귀족들에게는 식읍이나 녹읍의 명목으로 많은 토지와 포로들을 주어졌습니다. 아래 글에서 고대의 경제, 중세 사회의 경제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고대의 경제, 중세 사회의 경제

고대의 경제, 중세 사회의 경제

열매나 사냥, 고기잡이

오래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식물의 열매를 따 먹거나 사냥과 고기잡이를 하면서 살았습니다. 이 당시 사람들은 먹을 것을 찾아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살았습니다. 이후 사람들은 도구를 사용 하게 되었으며 곡식을 심어서 가꾸는 방법을 발견하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땅을 일구고 곡식을 가꾸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한곳에 머물며 정착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축을 기르고 수공업 발달

정착 생활을 하게 되면서 소, 양, 돼지,개 등의 가축을 기르게 되고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만드는 수공업도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 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경과 하면서 곡식이나 물건을 생산 하는 기술이 발달 하였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생산량도 늘어났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의 생활이 풍족하게 되었고 인구도 많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노예의 생산활동

이후에 사람들은 더 넓은 땅으로 이동 하기도 했으며 결국 다른 부족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전쟁에서 이긴 부족들은 전쟁에서 진 부족들을 잡아다 노예로 삼았습니다. 이후부터 노예들이 생산 활동을 주로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곡식이나 물건의 생산양이 늘어나면서 남은 물건은 서로 바꿔어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농민은 수취의 대상

귀족들이 사적으로 소유하는 토지와 노비가 증가하게 되었으며 경제 생활이 귀족 중심으로 편제 되면서 농민들은 국가나 귀족으로부터 수취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고구려의 농민들은 매 호마다 조로 곡식을 바치게 되었으며 개인의 경우에는 인두세로 벼나 곡식을 바쳤습니다. 또한 백제의 농민들도 조로 쌀을 바치게 되며 세로 쌀, 명주, 베 등을 바쳤습니다. 이외에도 일정 기간 동안 군역의 의무를 지거나 제방을 쌓는 부역에 동원되었습니다.또한 이때 삼국 사회에서는 고리대업도 상당히 성하였는데 고리로 꾸어 쓰고 만약 이를 갚지 못하면 노비가 되었을 정도 입니다.

중세사회의 경제

중세사회는 5세기에서 15세기 사이의 유럽 사회를 이야기 하며 이제 중세 사회로 넘어 오면서 땅을 많이 가진 지주들은 농민에게 자신의 땅에서 농사를 짓게 하고 그 대가로 농산물을 받았습니다. 이런 제도를 장원 제도 라고 합니다. 장원제도는 귀족이나 기사가 소유했던 넓은 토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촌락 단위로 형성된 공동체였습니다. 여기서 부터 장원을 소유한 영주가 농민들을 지배 했습니다. 11 세기 부터는 수공업과 상업의 규모가 커지고 화폐가 널리 사용되었으며 상인들의 지위도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통일 후 신라의 경제 생활

삼국 통일을 전후하여 경제 생활은 보다 더 귀족 중심으로 이루어져 가게 되었습니다. 통일 후에 신라의 귀족들은 녹읍을 소유하고, 그 곳에 사는 백성들에게서 조세와 공물을 징수하고, 노동력을 마음대로 징발 하였을 정도 입니다. 또한 섬이나 산간에 목장을 가지고 가축을 사육하는 한편, 고리대업을 하였습니다. 이런 강력한 귀족 세력을 누르기 위한 방법으로 국가는 귀족들의 녹읍을 폐지하였으며 관리에게 관료전이라는 토지를 주었습니다. 또한 일반 백성에게도 정전을 주어 경작하게 하며 국가에 조를 바치게 하였습니다.

귀족의 사치로운 생활

하지만 강력한 귀족들의 반발로 녹읍제가 부활되었으며 사원의 면세 토지가 날로 증가하여 국가 경제는 위태롭게 되었을 정도 입니다. 그리고 왕족과 귀족들은 경주에 호화 주택과 별장을 짓고 향락 생활을 즐겼습니다. 포석정, 안압지 등은 귀족들의 사치했던 옛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점차 전날의 굳건한 기상은 사라지고, 사회가 동요되어 갔습니다.

다양한 기술과 통계의 발달

이시기에 농업이나 목축업뿐만 아니라 수공업도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하고 견직물, 마직물의 방직 기술과 금⋅은 세공, 나전 칠기 등의 공예품 제조 기술이 발달하였습니다. 또한 상업도 발달하여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는 통일 이전에 설치된 동시 외에 서시, 남시가 설치되어 크게 번성하였습니다.
지방의 농민들은 대략 10호 가량의 혈연 집단이 거주하는 자연 촌락인 촌에 편입되어 있었으며 촌은 말단 행정 구역이었으며, 농민들은 몇 개의 촌을 관할하는 촌주를 통하여 집단적으로 국가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특히 통일 후에는 노동력과 생산 자원이 보다 철저하게 편제되어 관리되었습니다. 통일 신라의 민정 문서를 살펴보시면 남녀별, 연령별의 정확한 인구와 소, 말, 뽕나무, 호도나무, 잣나무 등의 수를 3년마다 한 번씩 통계를 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의 경제, 중세 사회의 경제 마무리

고대 시대에서 대부분 귀족들의 경우 사치로운 생활을 하고 노예나 농민들은 노동과 착취에 시달리면서 살아갔습니다. 그리고 고리대금에서 돈을 갚지 못한 경우 노예로 부역을 하는등의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전쟁등의 상황에서 많은 공을 세운 경우 신분의 상승이 이루어질 정도로 많은 노예와 토지등을 하사받기도 하였습니다. 통일 신라시대에는 이제 막 다양한 인구조사와 나무 가축등의 통계를 조사하는 등의 기록도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